오만가지 생각들

좋아함과 싫어함. 그 상대적인 것들에 대하여

phychic 2005. 10. 23. 19:57
[^] 누군가 얘기한다. "나는 이걸 좋아해. 왜냐구? ..."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며 산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얘기한다. "나 정말 걔 싫더라. 밥맛이야." 싫어하는 것 하나쯤 말하면서 사는 것 또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나 또한 분명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존재하며 하루 하루 이것들에 대해 무의식적인 반사 행동들을 보인다.

좋아한다와 싫어한다의 차이는 매우 상대적이다. 내가 맘에 들어하는 부분이 상대에게는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는 일부분일수도 있고 반대로 누군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을 난 싫어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기준은 뭘까? 가족이 대해주는 보살핌, 가족의 식성, 내가 사는 곳,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읽는 책 등등 접하게 되는 것들의 복잡한 혼합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좋아함과 싫어함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내가 초밥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내가 날생선을 좋아해서? 와사비의 매콤한 맛을 좋아해서? 결코 아니다. 그냥 내 맘에 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친구는 초밥을 싫어한다. 왜 싫어하냐고 물어봤더니 날로 된 것들을 안 먹는다고 한다. 왜 날 것을 싫어하냐고 물어보면 역시 딱히 설득적인 답변은 돌아오지 않는다. 비린내가 나거나 먹으면 역겹다 라고 말할 지언정 왜 비린내가 싫고 왜 먹으면 역겨운 지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즉,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 기준에 대해서는 누구도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범위를 좁혀 먹는 것들에 대한 예를 살펴보자. 내 경우, 어렸을 적 탕수육, 피자 등은 하나도 먹지 못했다. 먹으면 토할 거 같고 매일 집에서 먹는 된장국이나 생선구이하고는 너무나도 달랐기에 내겐 대표적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거치고 친구들과 지내면서 점차 식성이 바뀌었고 현재는 탕수육, 피자는 물론 손조차 대지 못했던 육회나 회도 좋아하는 음식들 중 하나가 됐다. 이 경우, 대부분 싫어하는 음식들은 안 먹어본 것들이거나 익숙해지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입에 들어가지 않았던 음식물에 대한 의식적인 행동이 계속적으로 그 음식을 멀리하게 만들고 나중에는 싫어하는 음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재밌는 건, 싫어하는 음식을 좋아하게 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들로 만들기 위해선 기작이 되는 요인들이 필요하다. 싫어하는 것들에서 새로운 면을 깨닫거나 남들의 추천을 통해서 설득받는 것 등과 같은 요인들 말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싫어하는 것을 접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음식도 자꾸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처럼. 이와는 다르게 기준 자체가 바뀌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외부에서 커다란 변화를 통해 여지껏 가지고 있던 커다란 틀이 무너지면서 좋아함과 싫어함의 기준이 순간 바뀔 수도 있다. 사랑이나 이별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그럴 수도 있고, 주위 사람들의 변화가 직접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신기한 건, 좋아하는 것이 싫어지는 경우 다시 좋아지는 건 굉장히 드물다. 원래 싫어하던 게 좋아지는 경우는 그나마 쉬운 일이지만 어떤 원인에 비롯하여 싫어하게 되는 경우 굉장한 반발감을 가지고 싫어하는 정도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든다는 건 내가 그것에 아직까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저런 감정조차 들지 않고 있었던 것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가장 슬픈 일이 아닐까 싶다.